여성, 게임, 그리고 사이보그 | 

오영진, 안가영

어떠한 게임 디자인 전략이 젠더에 따른 편견을 깨뜨리고, 이분법적인 세계를 허물어 젠더 감수성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첫 번째는 ‘혼종적 주체’ 되기이다. 오를랑은 비디오 게임의 형식을 이용하여 가상 세계 내에서 존재하는 사이보그적 형상을 통해 흩어진 자신의 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되받아쓰기와 되어보기’이다. 「어이쿠 왕자님」처럼 기존의 보편적인 인식으로서 여겨졌던 시스템들을 게임을 통해 뒤집으며 새로운 전략을 제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를 획득하지 않기’이다. 어퍼 원 게임즈는 잊혀가는 이누이트족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네버 얼론」을 제작하였다. 플레이어들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심포이에시스(함께 만들기)를 경험하게 된다. 

'여성, 게임, 그리고 사이보그'라는 주제로 오영진과 안가영은 <테크노 페미니즘으로 바라본 게임 문화>와 <아트 게임에서 사이보그적 상상력>에 대해 강연을 진행하였다.오늘날 게임제작과 플레이 경험에 있어 여성은 여전히 소외되고 공격받고 있다. 여성과 기술, 놀이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편견이 어떻게 담론이 되어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지 테크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현시대 게임문화를 조망해보며, 실제 수행적 사례를 통해 여성이 게임을 표현의 도구로써 사용하며 게임을 즐기는 방식까지 함께 살펴보았다.
오늘날 게임 문화 속 젠더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어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테크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러한 젠더 불평등은 게임뿐만 아니라 기술과 여성에 관한 편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로부터 여성은 과학기술에 부적합한 존재로서 여겨져 왔다.  이러한 편견이 지속적으로 누적되며 담론화되고,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를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임 문화 속 여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현상 또한 이러한 편견이 지식으로 통용되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노 페미니즘은 여성과 기술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기술은 여성을 해방시켰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게임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90년대 초 ‘사이버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널리 알린 예술가 그룹 '비너스 매트릭스(VNS Matrix)', 프랑스 행위 예술가 생 오를랑(ORLAN)과 같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작품과 최근의 아트게임, 또는 포스트 인터넷에서 여성들은 게임을 예술 표현의 도구로써 사용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많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자신들의 '몸'을 매체로 사용하며 수행적 주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바라 크루거, 게릴라 걸스, 오를랑과 같은 예술가들은 여성의 신체를 도구로서 사용하며 규범적인 젠더 개념을 허물고 수행적인 행위를 통해 젠더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다.더 나아가 여성들은 사이버공간(Cyber Space)을 전유하기 시작했다. 1991년 비너스 매트릭스는 남성중심적인 예술계에 도전장을 던지며 <21세기 사이버페미니스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언제나 타자화되어왔던 여성들의 인권을 회복하고자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진 사이버공간을 전유하며 여성과 기술과의 관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게임의 구조와 형식을 빌려 다양한 작품들은 제작하며 이를 수행했다. 게임 수행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하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남성성의 억압적 통제가 구성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괴한 모습을 띠는지, 그리고 여성주의를 통해 이 억압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게임의 패러디 효과와 현실 학습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진보넷, 2005) 

 <21세기 사이버페미니스트 선언문>일부 내용

이처럼 비너스 매트릭스는 게임을 통해 정보 기술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고 이를 가시화시켰다. 우리는 이를 게임과 여성과의 관계로 확장시켜 바라볼 수 있다. 게임의 중심은 언제나 남성 플레이어들이었다.  사이버 공간과 게임의 안과 밖에서 여성 플레이어들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하는 여성들은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 플레이어들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남성 중심적인 게임 속 이분법적인 세계를 허물며, 젠더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게임 디자인 전략을 실제 사례와 함께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혼종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 내 캐릭터들과 동화된다. 게임 속 캐릭터가 혼종적인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서 나타나는 게임과 예술 작품을  살펴보고, 이를 바라보고  플레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살펴보았다.

오를랑(ORLAN), <테크노바디(TechnoBody)>, 2015

<Genital Jousting>, 2018

오를랑의 <테크노 바디>는 비디오 게임의 형식을 이용하여 가상 세계 내에서 존재하는 사이보그적 형상을 통해 흩어진 자신의 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를랑은 인간의 몸 자체를 사이보그로 변형시키며 오늘날 기술시대의 신체가 지닌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혼종적인 주체의 대표적인 표상을 보여주는 예술 작품이다.
게임에서 살펴본 대표적인 사례로 <Genital Jousting>(2018)은 남성 성기가 중심 캐릭터로 등장한다. 플레이 방법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성기화된 표상으로 존재하며 단지 '느슨한 페니스와 흔들려 움직이는 애널을 구사'하면 될 뿐이다. 주인공 성기 캐릭터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성도착자가 된다. 마치 사람처럼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스토리이지만, 여성으로서 또는 남성으로서 이러한 사회와 조직 내에서 일상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남성 성기라는 형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혼종적인 주체성은 예술적 관점, 사고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게임을 통해  혼종적 주체로서 플레이어는 유희, 놀이를 얻기 위해 플레이했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게임과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어이쿠 왕자님>, 2008

두 번째는 '되받아쓰기와 되어보기'이다. 이는 '패러디와 아이러니'라는 전략과도 같다.  대표적으로 <어이쿠 왕자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린세스 메이커>의 젠더 패러디 버전이다. 이성애적 구조였던 <프린세스 메이커>와 달리 <어이쿠 왕자님>은 딸이 아니라 아들을 키우며  동성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가 플레이어를 오로지 아버지로 호명하였다면, <어이쿠 왕자님>(2008)의 경우 플레이어가 어머니가 될지, 아버지가 될지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보편적인 인식으로서 여겨졌던 모든 구조들을 게임을 통해 뒤집으며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세계를 획득하지 않기'이다.<네버 얼론(Never Alone)>(2016)은 북극을 배경으로 이누이트 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게임이다. 주인공인 이누이트족 '누나'와 흰 여우 '실라'는 알 수 없는 눈보라의 원인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플레이어는 누나와 실라를 번갈아 가며 플레이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실제 이누이트족이 등장한 영상과 나레이션은 게임의 서사에 빠지도록 만든다. 알래스카 비영리 단체 게임 제작사 어퍼 원 게임즈(Upper One Games)는 잊혀져가는 이누이트족의 문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게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고자 결심했고, <네버 얼론>을 제작했다. 플레이어들은 스테이지를 정복해나가며 세계를 획득하지 않고,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심포이에시스(sym-poiesis)를 경험하게 된다.우리는 그동안 이런 식의 게임 디자인을 많이 접해보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게임은 플레이어 간의 경쟁을 유도하는 구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그렇다면 <네버 얼론>처럼 심포이에시스적인 게임은 또 무엇이 있을까?

<네버 얼론(Never Alone)>, 2016

<젤다, 야생의 숨>(2017), <바운드(Bound)(2016)와 같은 게임들은 게임 속 세계를 정복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게임 속 세계와 교감을 통해 새로운 유희를 경험하게끔 만든다.<바운드>의 게임 플레이는 굉장히 독특하다. 주인공의 움직임은 마치 발레리나와 같이 역동적이고 아름답다. 평화로운 가정을 꿈꾸지만 아픔을 지니고 있는 딸의 인생이, 자신이 읽고 있던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현실과 소설 세계를 넘나들며 춤을 통해 아픔을 견뎌내고자 하는 서사가 담겨있다. 적을 물리치고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춤을 통해 이들을 피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바운드(Bound)>, 2016

이처럼 게임과 여성과의 뒤틀린 관계를 허물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살펴보며,  실제로 게임의 형식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안가영 작가의 아트게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회화를 전공했던 안가영 작가는 게임 속 가상세계, 3D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게임 엔진, 인터렉션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꾸준히 게임과 예술간의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대표적으로 <버츄얼 세렌디피티(Virtual Serendipity)>(2014)는 유니티 3D(Unity 3D)엔진을 활용하여 제작한 인터렉티브 미디어 설치 작품이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에 발견한 행운”이라는 의미로 우연적 이미지 혹은 텍스트 간의 충돌을 주제로 한 사이버 미신적 세계를 보여준다. 랜덤하게 구성되는 게임의 구조 속에서 캐릭터 또한 사용자의 정보와 조작에 따라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실제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버츄얼 세렌디피티(Virtual Serendipity)>, Interactive media installation, 2400 x 3800 mm (screen size), 2014

https://www.youtube.com/watch?v=l7gk9B9VM6M&feature=youtu.be (실제 플레이 영상)

또한 <버츄얼 세렌디피티>를 플레이한 랭킹 결과를 토대로, 상위 점수를 받은 플레이어들을 위해 <우연성의 배열 : 1위부터 5위를 위한 페인팅>(2014)을 제작하였다. 작가는 설치된 캔버스 천 위에 프로젝터로 게임 플레이 영상을 상영하고, 5위부터 시작하여 1위까지 캐릭터의 움직임을 생성된 길을 따라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우연성의 배열 : 1위부터 5위를 위한 페인팅>,  Acrylic on canvas, 2108 x 1600mm, 2014

이 외에도 <일요일 오후의 랜덤채팅>(2015), <헤르메스의 상자>(2016) 등 게임 인터페이스를 이용한 미디어 작업이 있다.안가영 작가는 미술의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만든 게임이 또 다른 시스템을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보며 모든 가능성이 열린 곳에서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벗어날 수 없는 편견 혹은 생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을 통해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특수한 매체이다. 작가는 이러한 매체로서 게임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이번 아트게임 렉처스를 통해 오늘날 게임과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게임 속 세상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과 편견은 우리 모두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이다. 
참고 자료'비너스 매트릭스(VNS Matrix), 사이버페미니스트 예술 동맹', 진보넷, 2005 (http://act.jinbo.net/wp/1332/)'이미지 공간의 텔레포터(Teleporter)가 되다 : 안가영_Interview', 국내 최초 미디어아트 채널 :: 앨리스온, 2017 (http://aliceon.tistory.com/2811)안가영 작가 홈페이지 (www.angayoung.com)
오영진(문화평론가, 한양대 에리카 <기계비평> 주관 교수)오영진은 문화평론가이자 한양대 ERICA 융복합 교과목 ‘기계비평’의 기획자 겸 주관교수로 2012년 이후부터 문학과 문화의 영역을 오가는 강의를 하고 글을 발표하고 있다. 주요 평론으로 '컴퓨터 게임과 유희 자본주의', '인디의 추억' 등이 있고, '거울 신경세포와 서정의 원리', '공감 장치로서의 가상현실' 등의 논문을 썼다.
안가영(미술작가)안가영은 홍익대학교 회화를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영상 예술학 박사 과정을 수료 중이다. 2017년 아트스페이스 정미소에서 주최한 Return to Alternative 공모전의 Game & Animation art 부문 선정되었고, 2018년 초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주관한 《게임잼: 예술, 정치, 디지털 게임》의 최종 3팀에 드는 등 꾸준히 게임과 예술과의 접점을 고민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2016년 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에서 <Lazy Teleport>,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에서 <헤르메스의 상자> 등 개인전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