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혜

박지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인터랙션 디자인을 전공했고 지금은 게임아트를 하고 있다. 게임을 작업의 표현 장치로 사용하고 있으며 작업의 주제로 기술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기술이 집약된 종합예술 매체인 게임으로 기술과 인간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 발생하는 모순점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게임의 서사구조와 전자적, 물리적 인터랙션 방식들을 차용해 작업에 이용하고 있다.

박지혜  20‘s ARCADE  mixed media  120 X 150 X 130cm  2018

20‘s ARCADE

1990년대 내가 아주 작은 아이였을 때 우리는 일본의 버블 경제 만화영화 붐으로 딸려온 누군가의 상상력을 보고 자라났다. 그 무지갯빛 시나리오 안에는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영웅이 되는 특별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허상을 좇고 꿈을 꾸는 인간의 고칠 수 없는 버릇이 미디어와 기술들을 이렇게 발전시킨 것일까? 아니면 경제발전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단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희적인 것들이 꼬리를 물고 만들어진 것일까? 어찌 됐건 우리 20대는 예전의 어른들처럼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어른이 되었어야만 하는 나이 20대에 우리는 미디어로 소통하고 장난치는데 바쁘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갤러리 속에서 우리들의 흔적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날아다닌다. 우리의 역사는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고 누군가 기록해 줄지도 모르고 조각조각 난 상태로 부유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가 한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꿈을 잔뜩 꾸면서 자라났는데, 버블버블, 나도 그 속에 있었는데, 대의와 거창한 소원을 위해 싸우기는커녕 현실 앞에 두 발로 서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현실에 두 발 붙이고 네모난 스크린 속을 본다. 나의 자아의 조각들을 사이버 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찾아본다.

초기 작업 계획

처음 작업을 기획했을 때 사이버펑크적 도시 풍경에 매트릭스의 전화 부스나 디지몬 어드벤쳐의 디지바이스처럼 가상의 공간으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무언가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작업물이 그려내는 그림이 어디에도 머물지 못해서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젊은 내 또래의 흔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내 꿈이 이루어지는 곳을 찾아, 아니 어쩌면 그런 곳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떠돌고 배회한다. 젊음은 유한한 것 같이 나를 재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엉뚱한 도피처와 같은 꿈을 꾼다. 사실 이번 작업을 했던 2018년도가 나에게는 밖에 홀로 나와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고 길어진 슬럼프의 끝자락에서 포기할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던 내 젊은 나날들에 대한 스케치를 청년 세대의 이야기와 엮어서 만든 것이 이번 작업 ‘이십 대의 아케이드’이다. 비록 그 모습이 아름답고 희망차지 않더라도.

작업 과정

초기 작업 계획에서 임근준의 ‘좀비 모더니즘’이란 글에 나오는 청년 세대의 문제 항목들을 뽑아내서 기능적인 슈팅 게임 스타일로 시리즈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기성세대의 텍스트를 가져온다는 것에서 진실함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스스로 스테이트먼트를 작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게임의 서사를 다시 만들었고, 공간 이곳저곳을 누비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게임 디테일을 너무 오래 고민한 나머지 게임 제작을 엉망진창 와당탕탕 끝내고, 게임기 케이스도 와당탕탕탕탕 마쳤으며, 외부 촬영까지 후다닥 끝낸 후 최종 전시를 준비했다.

20‘s ARCADE, 게임기 제작 중 (목공소 사장님과의 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작업은 전시장이나 게임을 위해 완벽하게 세팅된 공간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번 작업은 오브제를 불특정한 도심 한가운데 설치해서 현실 공간과 오브제를 동시에 보여주고자 했다. 오브제(게임기)가 야외에 설치돼야 하므로 이동성과 장시간 사용을 고려해서 라즈베리파이Raspberry Pi와 대용량 배터리를 이용해 제작하고자 했으나 테스트 시간이 부족해서 랩탑laptop으로 대체했다. 야외에 설치된 오브제는 플레이어가 게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일반적인 게임기의 외관이 아닌 사다리꼴 형태로 디자인했다. 이렇게 해서 게임의 중첩된 가상 공간과 실제 공간을 오가며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을 연출하고자 했다.

20‘s Arcade, 게임 스테이지 화면, 플레이어는 다양한 공간을 탐험할 수 있다.

박지혜, 20‘s ARCADE, mixed media, 120 X 150 X 130cm, 2018

에필로그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건물 안이 아닌 길거리에 작품을 설치한 것이 가장 재미있었다. 실외에 게임기를 가져다 놓았을 때 독립된 게임 자체를 넘어 실제 공간과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이미지와 작업 자체의 컨텍스트가 더욱더 흥미로워진다고 느꼈다. 시끄러운 거리 소음, 거리 풍경과 부조화하는 이상한 물체로서의 게임기를 플레이하며 공간 요소에 방해받는 플레이어의 모습이 특히 재미있었다. 다만 게임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재미를 위한 요소가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 작업에서도 게임과 실제 공간을 다루고 싶은데 이 둘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게임 자체도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플레이하면 선물이 쏟아지는 상업용 이벤트 게임도 아닌 노-잼 인터랙티브 미디어 게임아트를 길거리 한복판에 설치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작업 계획을 응원해준 융합예술센터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