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감각

2016년 가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에서는 첫 번째 강연 프로그램으로 <위치 감각 Your Positions>을 주최했습니다. 리서치 기반의 예술, 비평적 미디어 실천,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구/기획 등을 조망해 보고자, 각각의 강연에서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공간과 장소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세계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분리하여 투시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장소를 마주하고, 장소에 걸어 들어가고, 장소를 조성하며, 장소와 장소를 이동하며, 위치에 불과한 비장소를 통과하기도 하는 신체가 등장합니다. 한편 생명체와 문화가 집적되거나 연결되는 여러 물질적/비물질적 대상들을 장소로서 해석해보기도 합니다. 목소리를 포함한 신체도 장소가 된다. 마지막으로, 세계를 모사하거나, 장소를 만들거나, 장소들을 연결 짓는 동시대의 예술 작품과 활동들에 대한 질문들이 공유됩니다.


강연자들은 다양한 장소들을 마주하고, 혹은 만들거나 분석하는 연구자들, 기획자들입니다. 건축사 연구와 설계를 오가는 건축학자 임석재, 디자인 연구자이자 비평적 픽션 저술가 박해천, 여행과 답사를 통한 연구를 진행 중인 문화지리학자 김이재, 현대미술 큐레이터 콜렉티브 워크온워크의 박재용, 공연과 미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 방혜진과 큐레이터 김해주가 강연에 참여했습니다. 

불투명한 투명성: 유리, 몸-기계론, 시각중심주의 _ 임석재

한 사회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일치한다. 이는 곧 한 시대의 대표 가치관이기도 하다. 현대건축에서 건물과 몸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가치관은 '기계론'이다. '몸-기계론'은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두 건축가가 주도했다. 이 가운데 미스의 건축은 단연 유리 투명성을 대표한다. 몸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유리의 투명성은 실존 조건을 붕괴시킨 주범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문명의 뿌리 없이 가벼움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건축 현상이다.

집 안의 괴물들: 그들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_ 박해천

해방 이후 압축적 근대화의 시기, 중산층의 주거 공간은 어떻게 변모했으며 그 내부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을까? 아르누보와 범죄소설의 상관성을 탐문하던 발터 벤야민의 접근법을 따라 국내 소설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범인'이 아니라 '괴물'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합리성이 개인 삶의 원리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사회, 그런 사회의 사적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서사화하는 형식은 인과율에 따른 사건의 정교한 재구성보다는 목격자의 사사로운 증언담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범인의 정체가 흐릿해지고 그 자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미쳐 날뛴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리적 상상력: 경관의 예술에서 포켓몬 고까지 _ 김이재

지리적 상상력은 ‘장소/공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미지’를 찾고,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또는 다르게) 보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경관을 새롭게 재현했던 인상파 화가에서부터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현대 미술가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 탁월한 예술가들은 지리적 상상력의 달인이었다. 한편 예술가에게는 예술적 이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능력과 함께 작품이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될 수 있는 환경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적절하게 맥락화시키는 감각이 필수적이다. 트레이시 에민, 안토니 곰리 등 영국의 현대미술가뿐 아니라 이우환, 김아타, 양혜규, 서도호 등 한국의 예술가들 역시 공간을 이동하며 가능성을 실험하고, 각자의 예술 공간을 구축해 왔다. 또한 장소성과 맥락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지리적 상상력은 다양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대지미술과 안도 다다오, 자하 하디드 등이 설계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라따뚜이’, ‘니모를 찾아서’ 등 애니메이션, 가상현실과 일상생활 공간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 역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리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미술의 이름으로, 데이터의 폐허에서 _ 박재용

큐레이토리얼 콜렉티브인 ‘워크온워크’가 2011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미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어떤 변화를 거치고 있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미술은 비정형적 실천으로 이뤄질 수 있지만, 미술을 둘러싼 제도와 체계는 외려 정형화된 무엇을 지향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사회 각 분야의 제도와 표준, 원칙이 균일화되지 않은 한국에서, 미술이라는 모호한 영역은 단절과 혼란이 단연 돋보이는(?) 영역일지 모른다. 이때 미술 실천이란 무엇이며,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강연에 참여하는 이들의 질문과 문제제기, 간섭을 기대한다.

움직임이 발생하는 사이, 간격 _ 방해진, 김해주


목소리, 사건의 자리, space, site, position, mark _ 방해진흔히 시각적인 요소들보다 열등하거나 사소한 것, 따라서 논외의 것으로 치부되는 목소리는 그러나 은밀하고 급진적인 전략의 지점으로서 작동한다. 목소리는 서사를 주도하거나 배반을 획책한다. 신체의 일부이자 이면으로서 신체를 존재케 하거나 부정한다. 그처럼 목소리는 도리어 사건이 발생되는 장소, 혹은 사건 그 자체가 된다. 목소리는 어떻게 그 비가시성을 통해 가시성의 세계를 뒤흔들고 재편하는 미적, 정치적 장치가 되는가. 영상과 퍼포먼스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작품들의 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본다.
퍼포먼스와 영상 _ 김해주과거의 퍼포먼스를 접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이다. 기록 매체가 보편화된 1960년대부터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기록했고 또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를 실험했다. 또한 몸과 몸의 움직임은 다양한 영상 작업에서 소재이자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이 강의는 시간의 기록이자 기록된 시간으로 중첩되는 퍼포먼스와 영상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 사이에서 발생한 몇 가지 시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